
“잊어버리는 쪽이 아니라
기억하는 쪽으로 같이 가자는 뜻이지”
숨을 지닌 어떤 존재든 잊지 않기 위해
힘껏 끌어안은 일광
이숨 시인이 제2 시집 『그 불빛으로 일하러 간다』를 걷는사람 시인선 162번으로 선보인다. 등단 이후 8년 만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다정하고도 맹렬한 감각처럼 노동자의 삶을 새롭고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때 노동이란 재화를 버는 행위만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일을 포함한다. 시편에 등장하는 모두는 불 속으로 진입하면서 자신이 감당할 몫의 빛을 업는다. 시인은 무게가 육신을 짓누르지 않도록 범죄 피해자를 추모하고, 고독사한 청년을 조명하며, 사라져 가는 남극의 펭귄들을 돌본다. 자신을 빛보다 투명한 숨결 속에 숨겨 두고 유랑한다. 그런 존재가 시어로 주고받는 마음 자체가 애도다. 곳곳에 만연한 사라짐과 통증들은 아프지 않은 명도로 다시 쓰인다. 지켜보는 독자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숨 쉬는 법을 다시 배운다. 이해가 아니더라도 배움만으로 가능한 연대가 있음을 깨닫는다.
불빛 속에 고통만 만연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불빛으로 두지도 않았을 테다. “희망이 파르라니 돋던(화수분 미용실)” 시절을 지나는가 하면, “몸을 낮춰 넓게 펼친 두 팔로 희망을 받아 내는(로제트 식물처럼)” 방식을 습득하고, 그럼으로써 혼자라는 생각을 잊는다. 불과 빛과 불빛의 속성은 언제나 따뜻하고 채도 높은 쪽에 있다. 시집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시가 ‘제의’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 주목해 본다. 제사에는 향과 갓 지은 음식처럼 온도 높은 물성이 가득하다. 심지어 애도를 위한 촛불을 끄는 건 “한 점 심장 박동으로 켜졌던(행복한 제사)” 아이의 숨결이다. 불처럼 고통스럽지도, 빛처럼 안전하지도 않도록 구축한 세계 속에서 시인은 동시대를 바라보며 얻은 슬픔을 해소한다. “그녀가 눈이 부셔 눈을 감으면/슬픔이 색을 짓는다(슬픔은 무슨 색일까).” 모두의 불빛을 어루만질 때까지 그 색은 쉼 없이 변온할 것이다.
아, 나는 아문센이 걸었던 눈길을
뒤따르는 중이구나
극점에서 보면 사람은
대륙 밖에 존재하는 외계인일까
지평선과 빙하의 세계가 접촉하는
낯선 문명
채널은 여전히 방영 중이고
꿈은 원격으로 부팅 중이다
보이저 1호는 우주를 떠돌고
산 사람들은 지구를 유랑하고 있다
-「남극에는 이설이 없다」 부분
카메라로 찍으면 사진이 남고
시간으로 찍으면 영혼이 남는 게
인화된 우리라고 해도 될까
이번 생은 암실에서 나오고 싶다고
아이야, 세상의 이미지들은 만들어지는 꿈이란다
-「역광에 흔들리는 캔버스 유채」 부분
나는 내달리는 누 떼가 되지
거대한 강둑에서 불안에 쫓겨 물이 차오르고,
나일악어 같은 악다구니가 기다려
어쩔 줄 몰라 물살에 떠내려가고
눈을 뜨면 단안경 같은 빗방울 하나가 이마에 닿는다
번지는 동심원,
그 안 아직 말하지 않은 진심이
감정되고 있다
-「비 감정사」 부분
적는 일은 기억 하나를 꽂아 놓은
압정 같은 것이지
기억의 고정,
배운 적 없는 짐승들의 첫배
본능은 누군가 적어 놓은 방법 같은 것일까
공통분모는 기록의 한정판
헤이, 메모리 칩 어디 두었지
-「적다」 부분
어머니, 저는 날갯짓으로 날아오를 겁니다
빛 속에서 어둠의 배를 가를 겁니다
목련이 꿈틀거리며 봉오리 여는 것처럼
간밤 내 몸이 터 가는 느낌,
침낭 속에서 호흡을 밀어 넣으면 날개가 돋았다
회신되는 메일, 메어 있을 리 없는 매일
구석은 여기까지다
-「광장의 고치」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