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사 길이나 긴고랑길을 따라 집에서 가까운 아차산에 오르곤 한다.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영화사길을 지나면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도심의 번잡함으로 지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깊은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긴고랑길은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려 주는 나만의 산책로다.
며칠째 영하 17도를 넘나드는 한파가 몰아치던 어느 겨울날, 나는 평소처럼 아차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추위 탓인지 산길은 한적했고, 오르는 사람의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며칠 전 양지에 내려앉은 눈은 녹지 않은 채 길목마다 하얗게 쌓여 있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눈이 사각사각 밟히는 소리가 났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홀로 걷는 시간은 한겨울 산이 주는 조용한 선물이었다.
긴고랑길 입구 다리 밑을 지나던 중, 얼어붙은 계곡물 위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영하 17도의 추위 속에서 오르는 그 김을 보는 순간, 어릴 적 고향 우물가가 떠올랐다. 추운 겨울 아침이면 우물가에 김이 오르곤 했다.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물을 긷던 풍경이 아련하게 되살아났다.
산을 오르는 내내 어릴 적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동네 아이들과 얼어붙은 논두렁에서 썰매를 타던 일, 추운 날 아랫목에 모여 앉아 온기를 나누던 날들이 떠올랐다. 산길에서 마주친 그 한 줄기 김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추운 세상 속에서도 가슴 깊은 곳에는 온기와 희망이 남아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나에게 아차산은 잊힌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채워 주는 곳이다.
개인의 추억을 품어 주는 아차산은 조금만 시선을 넓혀 보면 오랜 역사와 넓은 자연을 지닌 산이다.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그리고 경기도 구리시가 만나는 자리에 있으며, 해맞이 명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매년 정초가 되면 많은 사람이 해맞이 광장에 모여 새해의 태양을 바라보며 안녕과 희망을 나눈다.
아차산의 가치는 행정 구역의 경계를 넘어 여러 지역과 이웃을 하나로 이어 준다는 데 있다. 광진구 주민들에게는 정겨운 뒷동산이 되고, 중랑구와 구리시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과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 유역을 두고 다투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해발 약 296미터의 완만한 산이지만, 한강 수로와 한성 백제의 터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 때문에 고대사에서 중요한 격전의 현장이었다.
아차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고구려 보루군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향해 남진하던 시절 이 일대를 전초기지로 삼았음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성벽의 돌과 흙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과 숨결이 남아 있다. 이곳은 또한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구리시 방향으로 이어지는 온달석과 고구려 대장간 마을, 중랑구의 망우산 능선길까지, 아차산은 세 지역의 역사와 자연을 이어 주는 통로다.
조선시대에도 아차산은 왕실의 사냥터이자 문인들이 찾던 명승지였다. 서거정을 비롯한 문인들은 한강이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고, 민초들은 산자락의 사찰을 찾아 마음을 다독였다. 아차산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삶을 지켜 보며 우리 역사의 한 자리를 지켜 온 산이다.
오늘날 아차산은 과거 전쟁의 기억을 품은 채, 광진·중랑·구리 주민과 서울 시민에게 쉼터가 되고 있다. 지하철 5호선과 7호선 등 교통이 편리하여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고, 완만한 능선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능선에 오르면 용마산과 망우산으로 길이 이어진다. 눈앞에는 한강과 도심의 전경이 펼쳐지고,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의 능선도 보인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답답했던 마음을 열어 주고, 삶을 이어갈 힘을 준다.
아차산은 나이나 신체 조건에 상관없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경사를 완만하게 만든 숲속 산책로는 휠체어나 유모차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다. 숲속 글방에 앉아 책을 읽거나 맨발로 흙길을 걷는 시간은 자연과 함께 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 준다.
산은 지나온 역사를 기억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듬으며, 앞날을 생각하게 한다. 아차산 자락의 광진, 중랑, 구리는 이 산이 준 자연과 역사 유산을 바탕으로 살기 좋은 터전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한자리를 지키는 아차산처럼, 그 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더욱 깊어질 것이다.
아차산의 이야기와 산행길에서 마주친 추억을 글로 옮기는 일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선다. 잊혀 가는 역사의 숨결을 되살리고, 삶의 추위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나누는 일이다. 영하 17도의 추위 속에서도 긴고랑길 계곡에서 김이 피어오르던 것처럼,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 가슴속에는 삶을 이겨 낼 온기와 희망이 남아 있다.
아차산이 전하는 이 메시지를 글로 담아낼 때,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삶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아차산은 한강 위로 새 아침의 태양을 떠올린다. 천년의 세월을 지닌 이 산 아래에서 광진과 중랑, 구리는 오늘도 내일을 향한 꿈과 희망의 이야기를 이어 간다.
[문용대]
한국수필 수필문학상 수상
문학고을 소설문학상 수상
지필문학 창립10주년기념 수필부문 대상 수상
코스미안뉴스, 브레이크뉴스 고정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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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학 부회장, 지필문학 이사
수필집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영원을 향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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