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보유한 70대 A씨는 겉으로 보면 상당한 자산가다. 오랫동안 보유한 집값이 크게 오르면서 주택 자산의 가치는 높아졌지만 매달 사용할 수 있는 돈은 국민연금과 소액의 금융자산에서 나오는 생활비가 대부분이다. 관리비와 식비, 의료비는 계속 늘어나지만 집을 팔지 않는 이상 오른 집값이 당장 생활비가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최근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액체 콘크리트 현상’이 주목받고 있다. 엄밀하게 정립된 공식 경제학 용어라기보다는 가계의 상당한 자산이 부동산이라는 ‘콘크리트’에 묶여 있어 필요할 때 현금처럼 자유롭게 활용하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말이다.
핵심은 ‘자산은 있지만 쓸 돈은 부족한’ 역설이다. 예를 들어 시가 10억원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매달 들어오는 소득이 200만원에 불과하다면 실제 생활 수준은 10억원이라는 자산가치보다 매월 200만원이라는 현금흐름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집값이 올랐다고 해서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병원비를 낼 때 아파트의 일부를 떼어 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고령사회와 맞물리면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경제활동기에는 근로소득으로 생활하면서 주택을 마련하지만 은퇴 후에는 소득이 크게 감소한다. 이때 평생 축적한 재산의 상당 부분이 주택 등 부동산에 집중돼 있다면 높은 자산가치와 부족한 생활비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박형근 교수(수원대 부동산학전공)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고령층의 경우 보유 자산의 상당 부분이 부동산에 집중돼 있어 자산가치는 높더라도 실제 생활에 필요한 현금흐름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며 “노후 자산관리는 단순히 부동산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가보다 보유 자산을 어떻게 안정적인 소득으로 전환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특히 집값이 높은 수도권에서는 이른바 ‘하우스 리치, 캐시 푸어(House Rich, Cash Poor)’ 문제가 더욱 두드러질 수 있다.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의 주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노후 생활비가 부족해 소비를 줄이는 상황이다. 자산 평가액만 놓고 보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외식과 여행은 물론 의료·돌봄 비용까지 걱정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액체 콘크리트 현상은 개인의 노후생활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부동산에 가계 자산이 과도하게 집중되면 소비 여력이 줄어들 수 있다. 은퇴 이후 소득이 감소한 고령층이 상당한 부동산을 보유하면서도 현금 부족 때문에 소비를 억제한다면 내수경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경우 가계 자산가치가 동시에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세대 간 자산 이전 문제도 연결된다. 부모 세대가 주택을 장기간 보유하다 사망 이후에야 자녀에게 상속할 경우 자산이 젊은 세대로 이동하는 시점이 늦어진다. 자녀 세대가 결혼과 출산, 주택 마련, 자녀 양육 등 가장 많은 자금이 필요한 시기에는 부모의 자산이 부동산에 묶여 있고, 정작 상속이 이뤄질 때는 자녀 역시 중·장년층이 되는 ‘자산 이전의 시간차’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부동산 보유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주택은 안정적인 거주 공간을 제공하는 동시에 노후생활의 중요한 자산이다. 문제는 전체 자산 가운데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고 이를 생활에 필요한 현금흐름으로 전환할 방법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대표적인 대안으로는 주택연금과 자산 재구성이 꼽힌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계속 거주하면서 주택자산을 활용해 매월 일정한 현금흐름을 확보하거나, 주거 규모를 줄이는 다운사이징을 통해 남는 자금을 금융자산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개인연금, 금융소득, 임대소득 등을 함께 고려해 노후 현금흐름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다.
박 교수는 “초고령사회에서는 부동산 가격 상승만을 기대하는 자산관리에서 벗어나 거주 안정성과 생활비 확보를 함께 고려하는 접근이 필요하다”며 “주택연금이나 다운사이징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부동산 자산의 유동성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액체 콘크리트 현상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자산의 크기와 생활의 여유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집값이 아무리 높더라도 생활에 필요한 현금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은퇴 이후에는 ‘자산은 많지만 쓸 돈은 부족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초고령사회에서 노후 준비의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이제는 ‘얼마짜리 집을 가지고 있는가’뿐만 아니라 ‘그 자산으로 매달 얼마의 생활비를 확보할 수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콘크리트에 묶여 있는 자산을 안정적인 현금흐름으로 전환하는 전략이 개인의 노후생활은 물론 우리 사회의 세대 간 자산순환을 위한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